다른 이름: Yang Wood · Great Tree Wood
갑목(甲木)은 십천간의 첫 번째로, 오행으로는 양목(陽木)에 해당한다.
갑목은 십천간의 첫머리에 위치한 양목으로——위로 솟구치고 구조를 지니며 개척해 나가는 나무의 성질이다. 고전에서는 이를 "하늘을 찌르는 나무(參天之木)"에 비유한다——뿌리는 깊고 줄기는 곧으며 가지는 하늘 끝까지 뻗는다. 일주(日主)가 되면 명주의 성정을 결정짓는데, 장중하고 바름을 지켜 아첨하지 않으며 타고난 지도력의 기질을 지녀 남의 지시를 받기 싫어한다.
갑목은 물의 도움을 받기를 좋아하나 물이 범람하는 것을 꺼리고, 금(金)에 다듬어져 재목을 이루기를 좋아하나 흙이 메말라 나무가 시드는 것을 꺼린다. "갑기합화토(甲己合化土)"는 오합(五合)의 으뜸으로, 하늘의 양목과 땅의 음토가 부부의 연을 맺어 흙의 성질로 화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공을 이루는 것을 상징한다.
‘큰 나무’라는 상(象)은 사실 뒤늦게 생겨난 것이다. 한대에 천간의 이름을 풀이한 일련의 문헌들은 갑을 씨앗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습으로 읽었다. 『한서·율력지(漢書·律曆志)』는 “껍질을 깨고 싹을 내민다(出甲於甲)”는 말로 그 이름을 풀이했고, 『설문해자(說文解字)』 역시 갑이 동방의 첫머리에 자리하며 양기가 움트기 시작하는 때라 하여, 초목이 갓 돋아나 아직 씨껍질을 이고 있는 모습을 취했다. 이 층위의 독법을 따르면 갑이 가리키는 것은 갈라진 그 겉껍질과 껍질을 깨는 한순간이지, 다 자란 뒤의 우람한 교목이 아니다. 송·명 이후 상법(象法)이 성행하고 나서야 갑은 하늘을 찌르는 나무로 굳어졌다. 명식을 읽을 때는 이 두 층위가 모두 살아 있다. 흙을 뚫고 나오는 한 번의 솟구침이 있는가 하면, 재목으로 자라난 형체도 있다.
『적천수(滴天髓)』는 십간의 체상(體象)을 논하면서 갑목의 첫머리에서부터 하늘을 찌르는 기세를 내세우고, 이어 봄에는 금을 용납하지 않고 가을에는 토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일깨운다. 봄의 나무는 이제 막 자라나는 참이라 금에 베이면 상하고, 가을의 나무는 이미 늙어 두터운 흙에 뿌리가 묻히면 막힌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실마리는 경방(京房)의 납갑(納甲)에서 온다. 팔괘를 십간에 배속할 때 건괘가 갑을 받아들이는데, 건괘는 순양이자 맨 앞에 나서는 괘이니, 갑이 십간의 첫머리에 놓이는 것과 서로 맞물려 뒷받침한다. 같은 한 글자가 역법·상수(象數)·명리라는 세 체계에 저마다 걸쳐 있는 셈이다. 갑목에 담긴 상징의 뜻이 유난히 두터운 까닭이 여기에 있고, 옛 책을 읽을 때 세 갈래의 언어를 뒤섞어 쓰기 쉬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갑을 볼 때 첫 단계는 상징의 뜻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갑의 건록은 인(寅), 양인은 묘(卯), 장생은 해(亥), 묘고(墓庫)는 미(未)에 있으니, 사주의 지지에 인·묘·해·미가 보여야 갑이 비로소 제대로 선다고 할 수 있다. 명식이 온통 사·유·축·신으로 채워져 있다면 천간의 그 갑은 떠 있는 것이다. 둘째 단계로 월령(月令)을 본다. 인월이나 묘월에 태어났다면 득령한 것이고, 신월이나 유월에 태어났다면 제압을 받는다. 이 순서대로 따라가면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두 가지 오독도 자연스레 걸러진다. 갑이 을보다 강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음양은 형태와 작용 방식을 나눌 뿐 높낮이를 가르지 않으며, 뿌리 없는 갑은 득령하고 통근한 을에 한참 못 미친다. 일간의 강약 자체에도 길흉은 없으며, 명식이 무엇을 반기고 꺼리는지, 곧 희기(喜忌) 속에 놓여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덧붙여 갑이 말하는 것은 천간의 성질이지 키나 체형과는 무관하며, 띠도 아니다. 일간과 연지로 정하는 띠는 본래 서로 다른 두 체계다.
십신으로 보면 갑이 경금을 만나면 칠살, 신금을 만나면 정관이 되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도끼질과 가지치기에 견주었다. 병화를 만나면 식신, 계수를 만나면 정인이 되니, 각각 해를 향하는 것과 비를 얻는 것에 해당한다. 앞에서 든 희기는 통칙일 뿐이며, 구체적인 가감은 조후(調候)의 갈래가 채워 준다. 봄의 갑은 나무가 여리므로 병화가 투출하여 따뜻하게 해 주고 경금이 알맞게 있어 재목으로 다듬어 주는 것이 좋다. 여름의 갑은 물이 열기를 식혀 주기를 반긴다. 가을의 갑은 금이 왕하므로 대개 화로 금을 제어하고 수로 둘 사이를 통관(通關)시킨다. 겨울의 갑은 추위에 얼어붙어 있으니 먼저 병화로 언 것을 녹인 뒤에야 나머지를 논한다. 갑기의 합에 대해 말하자면, 합은 관계이고 화(化)는 결과다. 토로 화하는지에는 따로 조건이 있으므로, 합을 보았다고 해서 곧바로 화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통 안에서도 갑목을 읽는 방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상법 계열은 비유를 중시하여 갑을 보면 곧 나무가 자라나는 정경을 떠올린다. 반면 격국법(格局法) 계열은 월령에서 어떤 십신이 투출하여 어떤 격을 이루는지만 묻고 상징의 뜻은 판단에 거의 넣지 않으므로, 두 계열은 같은 사주를 두고도 종종 서로 다른 데에 무게를 둔다. 오래 이어져 온 논쟁도 하나 있다. 양간은 기(氣)를 따를 뿐 세(勢)를 따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다. 신약한 갑이 명식 가득한 금과 토를 만났을 때 종살·종재로 논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일간을 돕는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두고 각 학파의 기준은 엄하고 너그러운 정도가 제각각이다. 이런 갈림길을 만나면 한 학파를 억지로 고르기보다 있는 그대로 나란히 제시하는 편이 전통 그 자체에 더 가깝다.
사주팔자의 네 기둥에는 각각 천간이 있으며, 그중 일주(日柱)의 천간을 일간(日干) 또는 일원(日元)이라 부르고 명주 본인을 나타냅니다. 일간이 갑이면 흔히 말하는 ‘갑목 사주’이며 양목에 속합니다. 주의할 점은 일간이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어느 달에 태어났는지, 지지에 뿌리가 있는지, 주위를 어떤 십신이 둘러싸고 있는지를 살펴야 비로소 한 명식을 실제로 어떻게 읽을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갑목이다’라는 사실만으로는 어떤 결론도 끌어낼 수 없습니다.
갑목은 물이 생해 주는 것을 반기고, 화를 통해 빼어난 기운을 펼쳐 내는 것을 반기며, 알맞은 양의 금이 와서 재목으로 다듬어 주는 것을 반깁니다. 반대로 물이 넘쳐 뿌리가 썩는 것, 흙이 두터워 뿌리가 묻히는 것, 금이 무거운데 제어할 것이 없는 것을 꺼립니다. 이러한 통칙은 앞에서 이미 정리했습니다. 실제로 용신을 취할 때는 월령과 기후의 차고 따뜻함을 봅니다. 겨울에 태어난 갑은 먼저 병화로 언 것을 녹이기를 구하고, 여름에 태어난 갑은 먼저 물로 열기를 식히기를 구하며, 가을에 태어나 금이 왕한 갑은 대개 화를 써서 금을 제어합니다. 같은 갑목이라도 계절이 다르면 필요한 것이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갑과 을은 모두 목에 속하며, 차이는 음양의 형태에 있을 뿐 강약의 등급에 있지 않습니다. 갑은 위로 자라 재목을 이루는 쪽을, 을은 옆으로 뻗어 퍼지는 쪽을 주관합니다. 한 사주에서 목의 힘이 강한지는 월령에서 때를 얻었는지, 지지에 뿌리가 있는지, 생해 주고 도와주는 기운과 극하고 빼내는 기운이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쓰인 글자가 갑인지 을인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명식 가득 금과 토에 둘러싸여 뿌리가 없는 갑은 묘월에 태어나 통근한 을보다 훨씬 약합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통에서는 오합을 ‘합’과 ‘화’의 두 층위로 나눕니다. 두 천간이 서로 합하는 것은 관계가 성립했다는 뜻이고, 합하여 토로 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화하려면 보통 월령이 토이고, 화신(化神)이 당령하여 힘이 있으며, 다른 천간이 와서 극하여 깨뜨리거나 합을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조건이 모자라면 대개 ‘합이불화(合而不化)’, 곧 합은 하되 화하지는 않는 것으로 처리합니다. 이때 두 천간은 서로 얽매여 각자 자유롭게 작용할 여지의 일부를 잃지만, 실제로 토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판단할 때는 이 둘을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가을 나무’라는 것 자체는 길흉을 가르는 판정이 아닙니다. 가을에는 금이 왕하고 목은 기운이 갇힌 상태에 놓이므로, 갑이 극을 받는 계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먼저 금을 제어할 화(火)가 있는지, 금과 목 사이를 통관시켜 줄 물(水)이 있는지, 지지에 기댈 목의 뿌리가 있는지를 살핍니다. 세 가지를 갖추면 가을의 갑은 오히려 재목으로 다듬어져 쓸모를 이루는 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 세 가지가 모두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 손상을 논합니다. 계절이 정하는 것은 출발점의 강약 환경일 뿐, 결과가 아닙니다.